재현 이후의 회화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방법

권시우



   회화는 사진을 대체할 수 있을까? 앞선 질문은 다소 무용하게 들린다. 16세기 무렵의 화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해, 보다 사실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려고 시도했다. 카메라 옵스큐라 내부에 투영된 장면은 일시적인 환영에 가깝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가 여전히 사진에게 기대하는 소위 ‘사실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사진의 개념적 원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진이 실제 대상을 고스란히 포착하지는 않으며, 그러한 가정은 의심스럽다. 굳이 사진의 역사적 계보를 추적하지 않더라도, 동시대 사진을 구성하는 픽셀이라는 단위는, 한때 사진이 선취했던 지표적인 성격을 손쉽게 무효화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사진에 대한 통념이다. 우리가 여전히 사진에게 은연중에 기대하는 것. 회화가 사진을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은, 결국 회화가 사실에 얼마만큼 부합하는지 새삼 재고하게 만든다. 이때의 회화는 추상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16세기를 되짚어보지 않더라도, 생각보다 많은 동시대 화가들은 자신이 마주한 특정한 상황을 캔버스에 묘사하기를 반복한다. 그러한 시도는 과연 통념상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포착하기 위한 방편일까? 휴대용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보편화된 형식인 스냅Snap은, 촬영자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손쉽고, 무엇보다 재빠르게 촬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사실성’이 촬영 속도에 의해 보장된다면, 몇몇 회화 작업들이 화가의 손에 의지해 포착한 이미지는, 언제나 사진보다 뒤쳐진다.

   그러나 동시대 화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사진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기보다, 각자가 포착한 이미지에 회화적 질감을 부여하는 것에 가깝다. 서재민의 작업 또한 마찬가지다. 2014년부터 진행한 <Drawing Series> 연작의 경우, 작업들 대다수는 작가가 일상에서 임의적으로 발췌한 장면처럼 보이는데, 그와 별개로 거친 유화의 필치가 두드러진다. 물론 이는 단순히 재현 회화에 대한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해당 연작에서 천착하는 일상의 단편들은, 단순히 '사실성'을 준거 삼아 회화로 구현됐다기 보다, 작가의 불안한 감정으로 채색돼 있다. 즉 작가에게 일상은 실시간의 파노라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Drawing Series>라는 별도의 카테고리에 업로드하기 위한 선별의 대상으로, 심지어 회화 차원에서 (재)편집되기에 이른다. 한때 카메라 옵스큐라가 재현 회화를 보조하려는 목적으로 매번 다른 장소에 설치됐다면, 이제 서재민과 같은 작가들은 장소를 불문한 채, 비/정기적으로 일상을 스냅하면서 스스로 카메라가 된다. 물론 각자 스냅한 결과물들을 회화적으로 보정하는 일련의 방식들은, 상이한 의도와 무관하게 표현주의의 관성에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회화적 질감은 마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사용자가 자신이 선별한 이미지에 적용하는 자동화된 필터와 유사한 시각적인 효과로 환원된다.

   작업 차원에서 그러한 클리셰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결정했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배열의 방식이다. 즉 <Drawing Series>를 구성하는 40개 남짓한 작업들은 제작된 순서와 무관하게,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연작의 서사는 매번 다르게 가시화된다. 이로써 개별 작업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불안이라는 심상은, 작가가 의도한 서사의 개연성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기에 이른다. 달리 말해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과)몰입하는 대신, 회화를 빌어 물리적인 형태로 조형된 불안의 이미지들을 전람하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서사 차원에서 조절/조율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적 시점을 확보한다. 이는 한때 개인에게 내재된 불가해한 감정에 불과했던 불안의 출처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련의 서사들을 결코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애초에 해당 연작은 일상의 파노라마를 개개의 이미지로 분절한 결과물이며, 그것들은 하나의 시퀀스로 종합되는 대신, 계속해서 (재)배열할 수 있는 일종의 서사적인 다이어그램을 지향한다.

   <Drawing Series> 이후, 작가는 꿈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를 개설한다. 이는 얼핏 꿈으로 대변되는 작가의 내면으로 다시금 침잠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스냅의 관성을 의식한 채, 일상에서 그러했듯 꿈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무의식을 부유하던 흐릿한 환영들은 차츰 자신의 해상도를 찾아나간다. 물론 스냅이라는 형식을 꿈에 온전히 적용할 수는 없다. 꿈은 애초에 실시간의 파노라마가 아니며, 다만 개인에 의해 두서 없는 잔상들로 기억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스냅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억에 의존해 꿈의 내용 일부를 텍스트 차원에서 기록하고, 그것을 회화 차원에서 연출하기를 반복한다. 비록 스냅이 구사하는 손쉽고 재빠른 촬영의 방식은 작동하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작가는 캔버스의 화폭을 마치 꿈속에서의 특정한 상황을 정지 이미지로 포착하기 위한 가상의 뷰파인더처럼 활용한다. 즉 개별 작업들은 꿈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Drawing Series>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서사의 얼개에 편입되지 못한 단편적인 이미지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개별 작업은 결코 전체를 파악하지 않는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포착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모두 가상의 뷰파인더와 동기화된 1인칭 시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꿈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를 개설한 것은, 일상에서 제한된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몇몇 작업들에서 연출된 초현실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응시하는 (프레임 외부의) 주체는 꿈의 지평을 유영하는 대신, 오로지 가상의 뷰파인더와 대응되는 단 하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데 몰두할 뿐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꿈은 스냅을 위해 주어진 물리적인 피사체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이 모든 정황들을 기록한 텍스트를 참조해, 사후적으로 가상의 뷰파인더를 만들고, 그것의 내부에 이미지를 투사할 수 밖에 없다. 달리 말해 일련의 작업들은 작가가 고수하는 1인칭 시점을 축으로 삼아 불확실한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꿈속에서의 특정한 상황을 기꺼이 재현 내지는 포착한 결과물이다.

   결국 꿈이라는 카테고리는 그러한 결과물들의 총합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작가는 마침내 1인칭 에서 벗어나, 카테고리의 전반적인 양상을 조감할 수 있는 위치를 점유한다. 이는 자연스레 <Drawing Series>의 사례를 연상하게끔 만드는데, 실제로 일련의 작업들은 여전히 이미지라는 조형 단위를 발생시키고, 그것을 배열하는 방식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이를테면 개별 작업은 화폭의 크기와 무관하게, 전체상의 일부만을 드러내는 불완전한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여타 작업들과 함께 꿈으로 범주화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담보하고 있는 최소한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작가의 무의식을 가늠할 수 있는 서사적인 다이어그램으로 편입된다. 즉 <Drawing Series>가 불안의 출처를 모색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이제 작가는 불안이라는 심상의 저변을 겨냥한다.

   이는 단순히 작가의 감정을 투사한 그림들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섣불리 탐구할 수 없는 무의식을 특정한 장면들로 대상화하고, 장면들 사이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물론 무의식 자체는 여전히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서사적인 다이어그램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람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조절하고 있는 시점의 배율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일련의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1인칭 시점과 카테고리 전반을 파악하기 위해 활성화한 전지적 시점 사이의 역학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개별 작업의 위상을 (재)정의해야한다. 즉 개별 작업은 독자적인 재현 회화를 지향하는 대신, 차후에 구성될 카테고리의 일부로 조감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채, 그에 부응하는 가상의 뷰파인더를 설정하고, 마침내 이미지를 포착한다.


   이로써 스냅은 단순히 손쉽고 재빠른 촬영의 방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루된 시점의 맥락 속에서 이미지를 조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후자는 단순히 재현을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실제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꿈과 같은 허구적 상황을 작가가 자신의 시점과 동기화된 프레임 내부에 시뮬레이션하게끔 유도한다. 그러나 회화는 여전히 사진을 대체한다기보다, 스마트 미디어가 보편화한 이후에 재/생산되는 사진의 프로토콜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해, 일종의 클리셰로 전락한 지 오래인 재현 회화의 방법론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한다. 이를테면 지금 시점에서 유통되는 사진들 대다수가 마냥 자신의 독자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대신, 가상의 계정을 위시한 특정한 플랫폼의 형식 및 내용에 부합하게끔 연출되는 것처럼, 일련의 작업들은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카테고리를 구성하기 위한 조형 단위로 기능하기를 자처한다. 그러므로 관객은 개별 작업 혹은 이미지를 감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것을 발생시킨 양가적인 시점을 의식한 채, 전시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서사의 국면을 가늠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의 서사를 어떻게 구현할 지는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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